패션 여행: 옷장 속 미지의 세계
엄마의 옷장 문이 열리자, 나는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평범한 일요일 오후, 엄마가 마트에 간 사이 그녀의 옷장을 몰래 뒤지던 나는 오래된 실크 원피스 하나를 발견했다. 손가락으로 부드러운 천을 쓸어내리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살짝 퀴퀴한, 그러나 묘하게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이 옷에서는 엄마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흔적이 느껴졌다.
"이걸 입어보면 안 될까?" 나는 속삭였다. 집에는 나 혼자뿐이었고, 엄마는 두 시간은 더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원피스를 입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방 안의 공기가 돌돌 말리는 느낌이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달랐다. 내가 아니었다.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금발 웨이브, 갈색 눈동자, 그리고 얼굴에 피어나는 미소까지. 내 몸은 그대로인데, 거울 속 이미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비엔나에서의 마지막 밤이 될 것 같아요."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억양이 섞인 영어였다.
눈을 깜빡이자 내 방은 사라지고, 나는 어느 호텔 방에 서 있었다. 1960년대 스타일의 가구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불빛 밝힌 성당, 그리고 쇼팽의 녹턴이 흘러나오는 라디오. 방 한구석에는 가득 채워진 여행 가방이 있었다.
"앙리, 정말 이렇게 떠나야 하나요?" 나는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 남자는 내게 슬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피, 당신도 알잖소. 우리의 시간은 여기까지였소."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다시 내 방이었다. 거울 속에는 평범한 17살 고등학생의 모습. 원피스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민지야, 문 좀 열어줘." 엄마의 목소리였다.
서둘러 원피스를 옷장에 걸어두고 문을 열었다. 엄마는 장을 본 물건들을 정리하며 이렇게 물었다.
"혹시 내 옷장 뒤졌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아니요."
엄마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원피스를 발견했구나."
침묵이 흘렀다.
"할머니가 파리에서 모델로 활동하실 때 입으셨던 거란다. 할머니는 그 옷에 특별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늘 말씀하셨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엄마는 웃으며 서랍에서 낡은 앨범을 꺼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내가 거울에서 본 그 여인이, 비엔나의 거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항상 말씀하셨어. '옷은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라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라고." 엄마가 말했다.
나는 그날 이후 패션이 단순한 옷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할머니의 원피스를 꺼내 입을 때면, 비엔나의 그 호텔 방에서 앙리를 기다리는 소피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