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보드게임: 인생의 주사위
"승진은 운이 아니라 전략입니다."
김부장이 내 책상 위에 낯선 상자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검은색 상자 위에는 금색 글씨로 '코퍼레이트 라이프'라는 제목이 새겨져 있었다. 회사를 테마로 한 보드게임이라고 했다. 퇴근 후 회식 대신 부서원들과 함께 게임을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나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퇴근 후에도 회사 사람들과 더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회의실 테이블 위에 게임판이 펼쳐졌다. 입사부터 퇴직까지 이어지는 경로가 그려져 있고, 각 칸마다 다양한 회사 생활의 상황들이 묘사되어 있었다. "성과 평가", "사내 정치", "프로젝트 마감", "휴가 취소". 너무나 현실적인 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사위를 굴리자 플라스틱이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가 회의실에 울렸다. 처음에는 형식적으로 참여했지만, 어느새 나는 게임에 몰입하고 있었다. 가상의 회사에서 승진하기 위해 자원을 모으고, 동맹을 맺고, 때로는 배신하는 과정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주사위 눈금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듯했지만, 사실은 선택과 전략이 더 중요했다.
"최 대리, 여기서 '업무 위임' 카드를 쓰면 더 좋았을 텐데," 김부장이 조언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평소 업무 미팅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진정성이 느껴졌다. 게임 속에서 우리는 계급을 잠시 내려놓고 있었다.
석 시간이 지났을 때, 나는 의외로 선두에 있었다. 두 번의 승진과 몇 개의 성과 보너스 카드 덕분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라운드에서 늘 조용하던 정 사원이 감춰두었던 '내부 정보' 카드를 꺼내들었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회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승부가 결정되는군요," 정 사원이 승리를 확정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모두 웃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씁쓸한 공감이 담겨 있었다.
게임을 정리하며 김부장이 말했다. "재미있었지? 이게 우리의 현실이야. 다만 실제 회사에선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게 차이점이지."
다음 날 아침, 사무실에 들어서자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책상 배열, 동료들의 행동, 심지어 복도를 지나가는 임원의 발걸음까지도 어제의 보드게임 조각처럼 느껴졌다. 김부장의 책상 위에 게임 상자를 돌려놓으며 쪽지를 남겼다. "감사합니다.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도 주사위는 던져졌다. 다만 이제 나는 이 게임의 규칙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