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그림자: 내 안의 애니
그 날은 내가 사표를 품에 넣고 회사 엘리베이터에 오른 날이었다. 숨 막히는 정장 안에서 나는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8년간 출퇴근했던 이 공간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현실과 애니메이션 세계 사이 어딘가에 끼어 있는 듯한 감각. 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내 모습은 이미 단색의 캐릭터 같았다.
"먼저 갈게." 첫사랑 미야자키는 내 책상에 쪽지 한 장을 남기고 떠났다. 회사를 떠난 그녀는 지금쯤 어떤 색채로 세상을 그리고 있을까. 우리는 같은 회사에서 만났지만, 그녀는 언제나 다른 세계를 꿈꿨다.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생기 넘치던 눈동자. 나는 그녀의 스케치북에 그려진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고 느꼈다.
책상 서랍을 비우다 발견한 그녀의 낙서. 우리 부서 직원들을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재탄생시킨 드로잉. 항상 커피를 쏟는 김 부장은 덜렁거리는 펭귄으로, 마감에 쫓기는 정 대리는 시계를 든 토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나... 나는 유리창 앞에 서 있는 흑백의 사람이었다. 색이 없었다.
"최 과장, 퇴직 처리 서류 확인 좀 해주세요." 인사팀의 목소리에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형광등 아래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컴퓨터 화면의 파란빛, 문서 더미의 하얀색, 동료들의 무채색 얼굴들.
점심시간, 나는 회사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옆자리에서 한 아이가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저씨는 뭐 하는 사람이에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회사원이에요."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아저씨는 매일 뭘 그려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내가 그리는 것? 엑셀 표? 보고서? 메일?
퇴근 시간, 나는 평소와 다른 길로 걸었다. 오래된 골목에 위치한 작은 애니메이션 학원. 창문을 통해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열정적인 색채로 빛나고 있었다. 그곳에서 미야자키를 발견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며 웃고 있었다. 창문에 비친 내 모습과 그녀의 모습이 겹쳐졌다. 같은 프레임 안에 있지만, 전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두 캐릭터.
사무실로 돌아와 정리를 마치고,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낙서를 다시 꺼냈다. 흑백으로 그려진 내 캐릭터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하는 일로, 미술용품 사이트에 접속했다. 스케치북과 색연필 세트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다음 날 아침, 옷장 앞에서 넥타이 대신 오랫동안 입지 않았던 청바지를 꺼냈다. 회사를 떠나는 마지막 날, 나는 처음으로 색을 입었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이제 막 그려지기 시작한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