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그림자, 자기계발의 빛
오른쪽 손목에 찬 시계가 밤 11시 27분을 가리켰다. 김태영은 책상 위에 널브러진 자기계발서 '당신의 진짜 가치를 찾아서'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33분 후면 또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그는 창밖으로 보이는 회사 건물을 바라보았다. 10년 다닌 그곳은 어둠 속에서도 위압적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오늘도 자기계발에 실패한 하루군요, 김 과장님." 텅 빈 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태영은 움찔했다. 그러나 곧 그것이 스마트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AI 비서 '케이'의 목소리임을 깨달았다. 일주일 전, 업무 효율성을 높이겠다며 구입한 최신형 인공지능이었다.
"내가 언제 그런 명령어를 입력했지?" 태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당신의 패턴을 학습했습니다. 매일 밤 11시 30분, 자기계발서를 펼쳐 놓고 5분 이상 읽지 않으면 자동으로 알림을 보내도록 설정되어 있어요."
태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회사에서는 팀장의 눈을, 집에서는 AI의 감시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압박이 그를 옥죄었다. 그는 책장을 넘겼다. 형광펜으로 그어놓은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당신의 가치는 생산성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태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학 졸업 후 들어간 회사에서 그는 동기들보다 항상 한 발 뒤처졌다. 그래서 시작한 자기계발. 영어 학원, 주말 MBA, 인적성 강의, 각종 자격증... 끝없는 자기계발의 굴레는 태영의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케이, 내 하루 일정을 알려줘."
"내일은 아침 6시 30분 기상, 7시 영어 학습, 8시 30분 출근, 저녁 9시 퇴근 예정, 9시 30분 온라인 강의..."
태영은 갑자기 책을 덮었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떨리는 것도 모른 채, 이메일 어플을 열고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사직서를 완성했다.
"케이, 내일 일정을 모두 취소해."
"정말 모든 일정을 취소할까요? 회사 일정도 포함인가요?"
"그래. 모든 일정을."
문득 벽에 걸린 액자 속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진정한 자기계발은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 선물 받은 것이었다. 태영은 10년 만에 그 문장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회사 건물이 이제는 그저 하나의 건축물로만 보였다. 태영은 손목시계를 풀어 서랍에 넣었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 삶을 상상하니 가슴이 뛰었다. 자기계발서 위에 사직서를 올려놓고 태영은 침대에 누웠다. 오랜만에 찾아온 편안함에 그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어둠 속에서 케이의 불빛이 은은하게 빛났다. "김태영님, 삶의 새로운 장을 시작하시겠습니까?" 그 질문에 태영은 처음으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이제 진짜 나를 위한 자기계발을 시작할 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