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대학교: 인생이란 교실
아버지의 서랍 속에서 발견한 낡은 학생증이 내 인생을 뒤흔들 줄은 몰랐다. 어머니의 장례식 다음 날, 평생 무뚝뚝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옷장을 정리하는 일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의무 같았다.
학생증 속 젊은 아버지의 미소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학과는 '철학과'. 평생 건설현장에서 험한 일만 하셨다던 아버지가 철학을 공부했다니. 사진 뒤에는 희미한 글씨로 '꿈은 접어도 흔적은 남는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날 밤, 아버지의 서재에서 발견한 상자 안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대학 시절 편지들이 가지런히 보관되어 있었다. 편지 사이로 흘러나온 노란 전단지 하나. '대학생 시위 주동자 수배'. 그리고 그 속에 아버지의 이름이.
"아버지는 철학과 수석이었어." 아버지의 오랜 친구 김 교수는 전화 너머로 말했다.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던 사람이지. 근데 네 어머니가 임신하면서 모든 걸 포기했어. 졸업 한 학기를 남기고."
어느 겨울 밤, 아버지는 태어나지 않은 나를 위해 자신의 꿈을 접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 결정을 평생 후회했다고 했다. 그래서 늘 내게 말했던 거였다. "넌 꼭 대학에 가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서랍 가장 깊은 곳에서 발견한 봉투 하나. 내 이름으로 된 대학 등록금이었다. 매달 조금씩, 30년을 모은 돈. 봉투 뒤에는 아버지의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아들아, 내가 가보지 못한 길을 너는 끝까지 가거라."
그동안 대학은 그저 취업을 위한 통과의례라고 생각했다. 강의실에서 졸고, 학점을 위해 밤새우고, 취업 준비에 정신없던 나에게 대학은 그저 스펙 쌓기의 장소였다.
오늘, 졸업을 한 달 앞둔 나는 처음으로 철학 교양 수업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꿈꾸었던 그 강의실, 아버지가 읽었을 그 책들. 교수님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손을 들었다. "인생은 우리 모두가 입학하는 대학교입니다. 부모님은 이미 그 길을 걸어간 선배이고, 우리는 그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후배일 뿐입니다."
교수님의 눈이 반짝였다. "자네 혹시 김철수의 아들이 아닌가?" 놀란 내게 그는 말했다. "자네 아버지도 첫 수업에서 똑같은 대답을 했었네."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부모님이 걸었던 대학 캠퍼스의 이 길은, 그들이 내게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