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여친: 누구의 기억인가
내 전 여자친구는 사진 속에서만 존재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내 핸드폰 갤러리 속 498장의 사진에만 존재한다. 그런데 어젯밤, 술에 취해 귀가한 나는 깨달았다. 내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여자가 내 갤러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엔 해킹이라 생각했다. 누군가 장난으로 내 핸드폰에 모르는 여자 사진을 심어놓은 것일까? 하지만 그 사진들 속에는 분명 내가 있었다. 한강에서 함께 찍은 셀카, 제주도 여행에서의 일몰, 크리스마스에 교환한 선물들. 그녀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나던 석류 샴푸 향이 코끝을 스쳤다. 모든 게 생생했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우야, 괜찮아?" 현수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커피숍에서 만난 고등학교 친구는 내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 이상한 걸 물어봐도 될까? 내가 여자친구 있었던 거 기억나?"
현수의 표정이 굳었다. "민지 말하는 거야?"
민지. 그 이름은 분명 처음 듣는데, 어딘가 익숙했다. 마치 오래된 노래를 갑자기 라디오에서 듣는 느낌. "그래, 민지."
"너... 진짜 기억 안 나? 의사가 말했잖아, 네가 사고 후에 특정 기억만 지울 수 있다고. 너가 그렇게 선택했잖아."
사고라니. 무슨 사고? 내 손이 떨려왔다. 갤러리를 다시 열었다. 마지막 사진은 6개월 전, 한강변이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내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배경에는 어렴풋이 다리가 보였다. 마포대교.
"그녀가... 뛰어내렸어?" 목소리가 갈라졌다.
현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뛰어내리려고 했어. 민지가 막으려다 둘 다 추락했고... 그녀만 살아남지 못했어."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이 진동했다. 알림이 떴다. '오늘은 민지의 기일입니다.'
갑자기 모든 게 물밀듯이 밀려왔다. 우리의 첫 만남, 첫 키스, 첫 싸움. 그리고 마지막 순간, 내가 난간을 넘었을 때 그녀의 비명소리. 이 모든 기억들을 어떻게 지울 수 있었을까? 하지만 동시에 이해가 됐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으니까.
핸드폰을 들어 마지막 사진을 다시 봤다. 이제야 알아차렸다. 그녀의 미소 뒤에 숨겨진 슬픔을. 내 눈에 비친 절망을. 그리고 지금, 그녀는 내 기억 속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사랑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사진 속에서,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영원히 살아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