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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여름

생존의 여름: 폭염과 그림자 사이

폭염경보 발령 27일째, 태양은 더 이상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적이 되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후끈한 공기가 폐 속으로 밀려들었고, 아스팔트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현실을 왜곡시켰다. 수돗물마저 끊긴 지 사흘째였다. 유리는 마지막 남은 생수병을 들고 창가에 서서 아파트 단지를 내려다보았다. 한때 푸르렀던 공원은 이제 황토색 먼지만 날리는 불모지가 되어 있었다.

"물 배급은 오후 다섯 시," 스마트폰 알림이 울렸다. 유리는 그제서야 팔뚝에 묻은 흙과 땀을 닦았다. 베란다 화분들은 시들어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마지막 한 모금의 물까지 식물에게 나눠주었다. 이 작은 녹색 생명체들이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복도에서는 이웃의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진짜 물이 온대. 지난번처럼 속이는 거 아니래." 유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두 번이나 정부 배급소까지 걸어갔다가 '오늘 공급량 소진'이라는 팻말만 보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마지막 물병이 비었으니, 이번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물을 구해야 했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오자마자 유리는 등 뒤로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뒤돌아보니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마른 남자가 보였다. 그의 눈은 유리의 가방에 고정되어 있었다. 빈 물병이 든 가방이었지만, 그는 그걸 알 리가 없었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배급소는 여느 때처럼 사람들로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유리는 줄의 끝을 찾아 서면서도 등 뒤의 기척을 놓치지 않았다. 그림자 남자는 이제 두 사람 뒤에 서 있었다. 태양은 정수리를 뜨겁게 내리쬐었고, 기다림은 두 시간을 넘어갔다.

"오늘 공급량은 1인당 1리터로 제한됩니다." 확성기 소리가 들렸을 때 군중 속에서 한숨과 분노의 웅성거림이 일었다. 유리는 물 한 병으로 며칠을 버텨야 할지 계산했다. 두 사람이 앞에 남았을 때, 갑자기 줄 앞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더 줘야 해! 우리 애가 열사병으로 쓰러졌다고!" 한 여자가 소리쳤다. 경비원들이 몰려들면서 혼란이 커졌고, 그 틈에 유리의 팔을 누군가 잡아당겼다. 그림자 남자였다.

"따라와요. 내가 살 길을 알아." 남자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공포에 질린 유리를 이끌고 남자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도망치려던 유리의 손목을 더 세게 잡으며 남자가 말했다. "내 말 들어봐요. 난 도시농업 연구원이었어요. 지하에 수경재배 시스템을 만들었죠. 물이 있어요. 깨끗한 물이."

유리는 도시 외곽의 한 폐건물 지하실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형광등 아래 푸른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고, 재활용 시스템으로 정화된 물이 순환하고 있었다. 남자—민석이라고 했다—는 여기서 다섯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우린 함께 살아남을 수 있어요." 민석이 물 한 컵을 건네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요. 모두가 오면 결국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니까."

유리는 물 한 모금을 마시며 민석의 말을 새겼다.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이다. 자신의 가족과 이웃들을 이곳으로 데려와야 할까? 아니면 소수의 생존을 위해 침묵해야 할까? 여름은 아직 한참 남아있었고, 폭염은 쉽게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물 한 방울의 가치가 생명과 맞먹는 이 여름에, 생존은 결국 누구를 구원하고 누구를 버릴 것인가의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