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소개팅: 에어컨 고장난 진실
서울 한복판, 36도의 살인적인 더위가 도시를 녹이던 날, 나는 굳이 소개팅을 잡았다. 에어컨 바람이라도 쐬려는 속셈이었다.
카페에 들어서자 차가운 냉기가 피부를 감싸안았다. 창가에는 이미 그녀가 앉아 있었다. 흰 원피스에 동그란 선글라스를 머리에 올린 모습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친구의 말대로 예뻤다. 하지만 내가 진짜 궁금했던 건 그녀의 외모가 아니었다.
"여기 에어컨 정말 시원하네요." 내가 뻔한 인사말 대신 꺼낸 첫마디였다.
그녀가 살짝 미소 지었다. "사실 제가 일부러 에어컨 빵빵한 곳으로 골랐어요. 이 더위에 밖에서 만나자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죠."
우리는 금방 공통점을 발견했다. 더위를 싫어한다는 것. 그리고 친구들의 맹목적인 소개팅 주선에 지쳐있다는 것.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우리는 지난 소개팅 실패담을 주고받았다.
"지난주에는 빙수 먹자고 해서 갔더니 에어컨 고장 났더라고요. 땀범벅 되면서 팥빙수 먹는데, 그 사람 땀 한 방울도 안 흘리는 거예요. 기계인가 싶었죠."
그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여름과 소개팅의 불편한 조합에 대한 농담이 이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화는 더 깊어졌다. 취미, 꿈, 그리고 각자의 상처까지.
두 시간쯤 지났을 때, 갑자기 카페 조명이 꺼졌다. 에어컨도 멈췄다. 정전이었다. 카페 직원이 당황하며 사과했지만, 불만의 한숨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녀가 내 눈을 바라봤다. "이제 어쩌죠?"
선택의 순간이었다. 다른 에어컨 있는 곳을 찾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제안을 했다.
"근처에 분수대가 있어요. 물놀이하듯 발이라도 담그면 시원할 것 같은데..."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진짜요? 갈래요!"
우리는 더운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분수대에 발을 담그자 시원한 물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햇빛 아래 그녀의 젖은 발가락이 반짝였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시원한 에어컨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훗날 우리는 결혼식에서 하객들에게 그 에피소드를 들려주곤 했다. 내가 의도적으로 카페 전기를 끊도록 직원에게 뇌물을 줬다는 거짓말과 함께. 그녀는 항상 그 말을 부정했지만, 나만 알고 있었다. 실은 그녀가 카페 주인 친구에게 미리 부탁했다는 사실을. 뜨거운 여름날,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소개팅을 구원하려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