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의 배신: 그녀는 내 여사친이었다
"인생은 생각보다 더 작은 원 안에서 돌고 돈다." 소개팅 자리에 앉은 순간, 맞은편에 나타난 여자를 보고 나는 그 말을 실감했다. 유리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고, 서로의 얼굴에 동시에 번진 당혹감은 공기 중에 고스란히 퍼졌다.
"지영아, 너였어?" 내 목소리가 떨렸다. 3년간 내 곁에서 웃고 울었던 가장 소중한 여사친이, 지금 소개팅 상대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보통은 당당했던 그녀의 눈동자가 테이블 위에서 춤추는 촛불처럼 흔들렸다. 우리를 소개시켜준 친구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너희 알아? 이거 완전 운명인데?"
운명이라기보다는 함정 같았다. 어젯밤까지 전화로 "내일 소개팅 어떡하지?"라며 조언을 구했던 지영이 내 앞에 앉아있었다. 봄바람이 들어오는 레스토랑 창가 자리는 갑자기 한여름의 찜통처럼 느껴졌다.
"우리 그냥... 솔직해질까?" 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와인 잔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순간, 3년간 쌓아온 우정의 레이어가 하나씩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나, 민준이 너 좋아하는 거 알아." 그녀의 고백에 나는 와인을 넘기다 기침을 했다. "그리고 나도... 너를 그냥 친구로만 본 적 없어."
우리 사이에 흐르던 시간은 마치 영화의 슬로우 모션처럼 느려졌다. 매주 금요일 함께했던 영화 관람, 시험 기간마다 밤새워 준비했던 스터디, 그녀의 이별 후 내 어깨에 기대어 흘렸던 눈물까지. 모든 순간이 다른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내 질문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너무 소중했으니까." 그녀의 대답은 단순했다. "우정을 잃을까 봐 두려웠어."
촛불이 깜빡이는 사이, 테이블 위에 드리웠던 어색함은 조금씩 녹아내렸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혹은 너무 몰라서 이렇게 됐는지도 모른다. 사랑과 우정 사이의 경계는 생각보다 훨씬 흐릿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물었다.
지영이 미소 지었다. 그녀의 눈에서 불안감이 사라지고 있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최악의 소개팅인 동시에... 어쩌면 최고의 첫 데이트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창밖으로 내리기 시작한 봄비가 유리창에 작은 강을 만들었다. 그 물결 너머로, 우리의 3년이 단순한 우정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나는, 이제 막 시작될 새로운 여정을 향해 다시 한 번 와인 잔을 들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