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썸타기: 우리가 쓰는 이야기
타이핑을 멈추자 커서만 깜빡인다. 열한 번째로 지운 문장이었다. 창밖은 어느새 새벽 세 시, 내일 출간을 앞둔 내 소설은 여전히 마지막 장이 비어있었다. 소설가로서 가장 두려운 순간이다. 모든 복선과 감정선이 모여 폭발해야 할 클라이맥스에서 나는 완벽하게 멈춰 섰다.
"승현아, 이거 보내."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자정에 퇴근했다던 에디터 지안이었다. 첨부된 파일을 열자 수정된 내 원고가 나왔다. 문득 따뜻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그녀가 나를 위해 밤을 새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안과 나는 3년째 '썸'이라는 애매한 관계를 타고 있었다. 소설가와 에디터. 우리의 관계는 언제나 원고 사이에 갇혀 있었다. 그녀가 빨간펜으로 내 문장을 지울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 설렜다. 그것은 단순한 업무가 아니라 우리만의 은밀한 대화였다.
"마지막 장면, 너무 뻔해. 독자들은 이미 두 주인공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어." 지안의 코멘트가 끝에 붙어있었다. 맞다. 뻔했다. 내 소설 속 주인공들은 서로를 향한 감정을 고백하고 행복하게 끝난다. 하지만 정작 소설을 쓰는 나는? 지안을 향한 마음을 3년째 고백하지 못하고 있었다.
화면을 올려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갔다. 두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장면. 그들의 대화, 눈빛, 서로를 향한 묘한 끌림. 모두 지안과 내가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에서 따온 것들이었다. 이 소설은 결국 내가 쓰지 못한 우리의 이야기였다.
갑자기 깨달음이 왔다. 내 소설의 결말이 뻔한 이유는, 그것이 내가 바라는 판타지였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용기 내지 못한 고백을 소설 속에서 대리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문장을 타이핑했다. 주인공들은 고백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에서 남자 주인공은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언젠가 그녀에게 보여주기 위해.
원고를 저장하고 지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새 결말 보냈어. 내일 아침 커피 한잔 할래? 소설 말고, 우리 얘기를 하고 싶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설의 제목을 바꿨다. '썸타는 사이'에서 '우리가 쓰는 이야기'로. 누군가의 소설이 되기보다, 우리가 함께 써나갈 현실이 되길 바라며. 창밖으로 새벽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새 책의 출간일이자,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