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친의 패션 선언
"넌 항상 검은색만 입는구나." 그녀가 말했다.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던 민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묘하게 떨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6년 동안 '그냥 친구'로 지내온 여사친의 얼굴에서 한 번도,본 적 없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검은색이 제일 무난하잖아." 내가 대답했다. 검은 후드티, 검은 청바지, 검은 운동화. 오늘도 나는 변함없이 무채색이었다.
민지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무난하다고? 준영아, 넌 무난한 게 아니라 숨고 있는 거야. 네가 언제부터 이랬는지 기억해?"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속도를 내는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은 흐릿했다. 그래, 언제부터였지.
"고등학교 2학년, 네가 입은 형광 노란색 티셔츠 기억나? 그날 너한테 반했어." 그녀의 말에 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날의 기억이 갑자기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 직후 교실에서 들었던 수군거림들도.
"형광색은 너무 튀어. 저렇게 입고 다니는 애는 첫사랑 대상에서 제외야."
민지는 손가락으로 내 검은 후드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그때부터 네 옷은 점점 어두워졌어. 넌 너의 색을 지워버렸어, 준영아."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우리가 내린 곳은 동대문 쇼핑몰이었다. 민지는 내 팔을 잡아끌며 여러 옷가게를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따라다녔지만, 그녀가 건네는 하늘색 셔츠, 연두색 니트, 심지어 분홍색 반팔까지 하나씩 입어보기 시작했다. 거울 속 낯선 내 모습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민지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진짜 너야, 준영아." 민지가 웃으며 말했다. "넌 원래 이렇게 다채로웠어."
그날 밤, 새 옷들이 가득 담긴 쇼핑백을 방 한구석에 두고 침대에 누웠다. 머릿속에서는 민지의 말이 맴돌았다. '내가 정말 숨고 있었던 걸까?' 스마트폰이 울렸다. 민지의 메시지였다.
"내일 그 하늘색 셔츠 입고 와. 네게 할 말이 있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옷장에서 검은색 티셔츠를 꺼내다 멈췄다. 그리고 쇼핑백으로 손을 뻗었다. 6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내일 무슨 색을 입을지 고민하며 잠이 들었다. 어쩌면 패션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세상에 선언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민지는... 아마도 이 선언을 들을 첫 번째 사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