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친과 판타지: 그녀가 남긴 이면의 세계
사랑에 빠지기 가장 좋은 계절은 가을이라는 건 여자친구가 나를 떠난 후에야 알게 됐다.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녀의 편지가 내 손바닥에 내려앉은 건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미안해, 내가 누구인지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아름다운 필체로 쓰인 이 한 문장이 내 일상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민지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아니, 적어도 내가 그렇게 믿었다. 도서관 자료실에서 우연히 같은 책을 집으려다 만난 우리는 단 3초의 눈빛 교환으로 6개월의 연애를 시작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은 대부분 판타지 소설과 영화였다. 특히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에 관한 이야기들을 수집하듯 읽었다. 그게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편지를 받은 후, 나는 그녀의 원룸을 찾아갔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민지는 없었다. 대신 벽에 붙은 거대한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도시의 지도였지만, 낯선 글자들과 기호들로 가득했다. 특정 장소들—우리가 데이트했던 공원, 처음 만난 도서관, 첫 키스를 했던 전망대—모두가 붉은 선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중심에는 내가 모르는 언어로 뭔가 쓰여 있었다.
그녀의 침대 밑에서 발견한 일기장에는 "포털 개방까지 D-30", "그를 데려갈 수 있을까" 같은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시간이 부족해. 혼자 가야 해. 미안해 현우야"라고 쓰여 있었다. 내 손끝이 얼얼해졌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평온했다. 어쩌면 나는 항상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그녀가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날 밤, 나는 지도에 표시된 마지막 장소인 도시 외곽의 폐허가 된 천문대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자 달빛이 쏟아지는 원형 공간에 민지가 서 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미세하게 빛나고 있었고, 공기 중에는 내가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가 맴돌고 있었다.
"비밀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 그녀가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말할 수 없었어. 그곳의 규칙이야."
"어디서 왔어?" 내 목소리가 떨렸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곳. 네가 읽던 모든 판타지 소설보다 더 놀라운 곳." 그녀의 눈에서 이슬비처럼 빛이 흘러내렸다. "난 관찰자로 왔어. 하지만 네게 감정을 갖게 되면서 모든 계획이 무너졌어."
천문대 중앙에 공기가 찢어지듯 푸른 빛의 균열이 생겼다. "나랑 같이 갈래?"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순간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녀의 이상한 습관들, 가끔씩 보이던 헷갈리는 표현들, 별을 볼 때마다 보이던 그리움 가득한 눈빛까지.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려다 멈추었다. "네가 진짜 민지라면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 알고 있을 거야."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내 선택을 말하기 전에 그녀에게 마지막 키스를 했다. 그리고 그녀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현실도, 판타지도 아닌 곳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
푸른 빛이 그녀를 감싸고 사라졌을 때, 천문대에는 나 혼자만 남았다. 하지만 내 손바닥에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작은 씨앗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약속이었을지도 모른다—언젠가 우리의 세계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