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흔적, 사라진 여친
호텔 방 키카드가 문에 깜빡이는 초록색 불빛에 평소와 다름없이 반응했지만, 내 심장은 그렇지 않았다. 이번 파리 여행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나는 혼자 왔지만, 방 안에는 분명 두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
침대 옆 테이블 위에는 낯선 립스틱과 작은 향수병이 놓여 있었다. 욕실 선반에는 여성용 헤어브러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방금 호텔에 체크인했다. 이 물건들이 이곳에 있을 리 없었다. 하우스키핑의 실수라고 생각하며 프런트 데스크에 전화를 걸었다.
"죄송합니다만, 제 방에 이전 투숙객의 물건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전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선생님, 혼자 오셨다고 하셨죠? 동반자는 없으신가요?"
이상한 질문이었다. "네, 혼자 왔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어제 체크인하실 때 여자친구분과 함께 오셨는데요. 그녀는 지금 어디 계신가요?"
등줄기로 한기가 흘렀다. 나는 어제가 아닌 오늘 체크인했다. 그리고 여자친구는 없었다. 적어도 2년 전 헤어진 이후로는.
침대 위에 놓인 카메라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손이 떨리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는 내가 보였다. 아니, 확실히 나였지만 동시에 낯설었다. 화면 속 나는 웃고 있었고, 옆에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딘가 익숙했다. 영상 속 나는 에펠탑, 루브르, 몽마르트를 그녀와 함께 거닐고 있었다. 우리는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 여행의 어떤 순간도 기억하지 못했다.
마지막 영상이 재생되었다. 카메라는 호텔 방 침대 위에 놓여 있었고, 화면 속 나는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이걸 보고 있다면, 넌 다시 잊어버린 거야. 그녀는 네 여자친구였어. 그리고 너는... 너는 사고 이후로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어. 매일 아침, 넌 그녀를 잊는다. 그리고 그녀는 매일 너에게 자신을 다시 소개해왔어. 3년 동안."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창문을 향해 걸어가 바깥을 내다보니, 에펠탑이 파리의 저녁 하늘에 우뚝 서 있었다. 그때 호텔 방 문이 열렸다. 카메라 속 그 여자가 커피 두 잔을 들고 서 있었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서 희망과 체념이 동시에 읽혔다.
"안녕,"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나를 기억하고 있니?"
그 순간, 휴대폰 갤러리에는 내가 찍지 않은 수백 장의 여행 사진이 있었고, 각각의 사진 속에서 그녀는 날마다 다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