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영상: 픽셀 속에 남은 여친
컴퓨터 화면이 깜빡이며 그녀의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삭제 버튼에 손가락을 올려놓은 채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이제는 추억이 된 여친의 모습이 1920×1080 픽셀 속에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오빠, 이거 찍지 마!" 카메라를 향해 손을 뻗는 그녀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내 심장은 그 소리에 반응하며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졌다가 차갑게 식었다. 영상 속 그녀의 머리카락은 가을 햇살 아래 춤을 추고 있었고, 그때의 바람 소리까지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우리가 함께했던 마지막 가을이었다.
손가락을 삭제 버튼에서 떼고 재생 시간을 확인했다. 1시간 32분 17초. 우리의 3년이 고작 이 정도 길이의 영상들로만 남아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한 때 나의 여친이었던 그녀와의 시간은 이제 디지털 코드로 압축되어 하드 드라이브의 한 폴더에 갇혀 있을 뿐이었다.
"다음에 우리 꼭 여기 다시 와야 해." 영상 속에서 그녀가 말했다. 그때만 해도 '다음'이라는 시간이 우리에게 있을 거라고 믿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내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이 영상에서도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모든 순간을 기록하고 싶었다. 마치 언젠가 이렇게 혼자 영상을 볼 날이 올 것을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영상 속 배경은 우리가 자주 갔던 한강 공원이었다. 그날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만든 요리를 도시락에 싸왔다. 음식의 맛은 형편없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지금 봐도 눈부시게 자랑스러웠다. "어때? 맛있지?" 영상 속 그녀의 질문에 화면 밖에서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내가 인생에서 한 가장 진실된 거짓말이었다.
영상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는 카메라를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렌즈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이거 평생 보관해. 우리가 늙어서도 같이 볼 수 있게." 그 말을 끝으로 화면이 검게 변했다.
마우스 커서가 삭제 버튼 위에서 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결국 나는 영상을 닫고 폴더 이름을 변경했다. '지울 영상들'에서 '그녀의 기록'으로. 우리의 관계는 끝났지만, 그 순간들은 여전히 내 삶의 일부였다. 어쩌면 진짜 이별은 그녀를 잊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의 추억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컴퓨터를 끄자 화면이 검게 변했고, 그 속에 내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의 새 폰에는 내 영상이 남아있을까, 아니면 진작에 삭제해버렸을까.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서 영상 속 추억으로만 존재하는 사이가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