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요리사: 기억의 맛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건 가장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서울은 찌는 듯한 열기로 숨쉬기조차 버거웠지만, 나는 곧장 기차를 타고 할머니가 살던 바닷가 마을로 향했다.
할머니의 오래된 집에 들어서자 문득 식어버린 공기가 느껴졌다. 열린 창문으로 해변의 소금기 섞인 바람이 들어왔지만, 언제나 가득하던 된장찌개 냄새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부엌으로 들어서니 할머니의 낡은 앞치마가 걸려있었다. 그것을 만지자 손끝에 밀가루 감촉이 남는 듯했다.
"요리는 사랑을 담는 그릇이야."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내가 열 살 때부터 여름방학이면 이곳에 와서 할머니와 함께 요리했던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시장에서 고른 싱싱한 생선, 할머니 텃밭에서 따온 풋고추, 그리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익어가던 음식들.
부엌 선반 위에는 할머니의 레시피 노트가 놓여 있었다. 누렇게 변한 페이지를 넘기자 낯익은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민수에게, 요리는 기억을 만드는 일이란다. 네가 내 음식을 기억하듯, 다른 이에게도 그런 기억을 선물하렴.'
창밖으로 눈을 돌리자 해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무더운 여름날, 그들의 웃음소리가 바다 소리와 뒤섞여 들려왔다. 문득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준비해둔 듯한 재료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오이, 문어, 미나리... 여름 물회를 위한 재료들.
앞치마를 둘러메고 칼을 들었다. 손놀림은 서툴렀지만, 할머니가 알려준 대로 오이를 얇게 채 썰고, 문어를 삶아 적당한 크기로 잘랐다. 식초와 고추장, 매실청을 섞어 양념을 만들며 내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다.
완성된 물회를 들고 현관 앞 평상에 앉았다. 할머니가 늘 앉던 그 자리였다. 한 숟가락을 떠먹자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차가운 국물 속에서 느껴지는 바다의 맛, 매콤함과 새콤함이 어우러진 균형, 그리고 할머니의 손맛. 나는 깨달았다. 할머니는 떠났지만, 이 요리 속에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을.
저녁 무렵, 해변에서 놀던 아이들이 지나가다 내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아저씨, 뭐 먹고 있어요?" 한 아이가 물었다.
"여름 물회란다. 같이 먹을래?" 내가 물었다.
그날 저녁, 할머니의 평상에는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아이들은 처음 맛보는 물회에 감탄했고, 나는 그들에게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밤바람이 불어오자 모기향을 피우며 할머니가 그랬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름밤, 요리의 향기 속에서 할머니는 다시 살아났고, 나는 이제 그 기억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