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여사친: 성장의 역설
그녀의 책장에 꽂힌 자기계발서들은 내 무기력함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너 뭐 하나 제대로 해본 게 있니?" 소연의 방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항상 이런 무언의 질문을 받는 기분이었다. 대학 4년 내내 '여사친'으로 남아있는 동안, 나는 그녀가 어떻게 스스로를 끊임없이 발전시키는지 지켜봐 왔다.
"민수야, 넌 정말 아무것도 안 바뀌더라." 소연이 커피를 저으며 말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을 햇살이 그녀의 단정한 포니테일을 비추고 있었다. 쓰디쓴 아메리카노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게 매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냥 안주하는 거더라."
소연은 대학에 입학했을 때부터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러닝을 했다. 토익 990점, 한국사 1급, 컴퓨터 활용능력 1급. 졸업할 때쯤엔 자격증이 열 개는 넘었다. 나는 그동안 게임 레벨만 올렸다. 소연의 말대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취업 준비는 어떻게 돼가?" 그녀가 물었다.
"글쎄..." 대답 대신 커피만 홀짝였다.
소연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추천하는 책 좀 줄게. 너도 이제 자기계발에 신경 써야 할 때야."
다음 날, 소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자기계발서 제목 다섯 개와 함께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난 다음 주에 일본 가. 취업 됐어.'
갑작스러운 소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하루 종일 멍하니 있다가 서점으로 향했다. 소연이 추천한 책들을 하나씩 고르며 처음으로 '변화'라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3개월 후, 소연에게 연락이 왔다. "잘 지내? 한국에 잠깐 들어왔어." 우리는 예전에 자주 가던 카페에서 만났다. 그녀는 여전히 빛이 나는 듯했지만, 어딘가 지쳐 보였다.
"회사는 어때?" 내가 물었다.
"바빠... 너무 바빠."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매일 새벽까지 일하고, 주말도 없어. 자기계발서에는 안 나오는 이야기지."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취업했어. 작은 스타트업인데, 재밌어."
소연의 눈이 커졌다. "정말? 축하해! 자기계발서 도움이 됐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책들은 다 읽다가 포기했어. 대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걸 찾았지. 네가 떠난 뒤에야 깨달았어. 자기계발이란 건 남들이 정한 기준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길을 찾는 거라는 걸."
소연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의 눈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너의 자기계발서였던 걸까?" 그녀가 쓸쓸하게 웃었다.
카페 창문 밖으로 낙엽이 휘날렸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깨달았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 우리가 읽어야 할 가장 중요한 책이라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여사친'이라는 경계는, 우리가 서로에게서 배워야 할 가장 큰 성장의 기회였는지도 모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