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친의 화장품: 비밀의 향기
그녀가 남긴 화장품 하나가 내 인생을 바꿀 줄은 아무도 몰랐다. 특히 나는.
대학 4년 내내 옆자리를 지켜준 수진이가 졸업 후 갑작스레 유학을 떠난 지 일주일째. 그녀가 놓고 간 작은 향수병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내 책상 서랍 깊숙이, 마치 의도적으로 숨겨둔 것 같은 위치에 자리했다. 크림색 유리병에 담긴 액체는 은은한 황금빛을 띠고 있었고, 라벨에는 수진의 필체로 '기억의 시간'이라고 쓰여 있었다.
"평범한 친구 사이였잖아. 그냥 여사친이었을 뿐인데..."
그런데 왜 가슴이 이렇게 먹먹해지는지. 나는 호기심에 향수를 한 번 뿌려보았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교실 뒤편에서 졸던 나를 깨우던 수진의 목소리, 시험 전날 밤새 전화로 문제를 풀어주던 그녀의 웃음소리, 그리고 마지막 날 '그냥 친구로 남자'는 말을 내뱉던 그녀의 떨리는 눈빛까지. 마치 영화처럼 기억들이 쏟아져 내렸다.
다음 날, 호기심에 수진의 SNS를 뒤적거렸다. 그녀의 프로필에 올라온 글이 눈에 들어왔다.
"향기는 기억을 품는다. 내가 만든 첫 화장품, 누군가에겐 평생의 선물이 되길."
선물? 향수라기보다 그녀가 직접 만든 화장품인 셈이었다. 댓글에는 그녀의 소규모 화장품 브랜드 런칭 소식이 가득했다. 그제서야 화학과였던 수진이 항상 향과 화장품 연구에 열정적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나는 그동안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밤 그 향수를 뿌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매번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어느 날은 우리가 함께 비를 맞으며 뛰어가던 순간, 또 어느 날은 그녀가 몰래 내 생일 케이크를 준비하던 모습. 마치 수진이 의도적으로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 같았다.
한 달 후, 향수병이 바닥을 드러낼 무렵, 나는 결심했다. 그녀가 있는 파리로 비행기 표를 끊었다. 가방에는 그 빈 향수병만 담았다. 파리 외곽의 작은 공방 앞에 도착했을 때, 수진은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문 앞에 서 있었다.
"결국 찾아왔구나. 그 향수는 내 기억이 아니라 네 기억을 담은 거야. 네가 보지 못했던 순간들, 두 사람의 진짜 감정을."
그녀의 손에는 또 다른 화장품 병이 들려있었다. 라벨에는 '우리의 미래'라고 쓰여 있었다. 때로는 여사친이라는 단어 뒤에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는 데 특별한 화장품 한 병의 마법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