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 에스파와 나의 비밀스러운 직장 생활
나의 직장 책상 서랍 안에는 에스파 멤버들의 포토카드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30대 중반 남성 회계사가 아이돌 굿즈를 모으는 취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이 빌딩 안의 누구에게도 알려져선 안 되는 비밀이다. 특히 오늘같은 분기 결산 날에는.
"김 대리, 저번 달 매출 분석 보고서 좀 가져와." 부장의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서랍을 닫았다. 카리나의 싱그러운 미소가 담긴 포토카드가 서랍 틈에 끼어 삐죽이 보이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회의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엑셀 시트와 그래프로 가득한 보고서를 들고 가는 내 머릿속에선 에스파의 'Next Level' 멜로디가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어제 밤늦게까지 신곡 뮤직비디오를 반복해서 봤던 후유증이다. 결국 보고서 마감은 새벽 두 시였다.
회의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은 원래의 나와는 너무나 달랐다. 검정 정장에 단정히 넥타이를 맨 회계사. 하지만 에스파의 콘서트장에서는 응원봉을 흔들며 환호하는 열정적인 팬이 된다. 두 개의 세계를 오가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아이엔티티.
"이번 분기 실적이 좋지 않네요. 김 대리, 어떻게 생각해?" 부장의 질문에 나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 주머니 속 진동이 울렸다. 에스파 팬클럽 알림이다. '오늘 저녁 7시, 신곡 발표'라는 메시지.
"김 대리?" 부장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선 콘서트 티켓팅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과 분기 보고서 수정본을 내일까지 제출해야 한다는 현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제 생각에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더 투자해야 합니다." 내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기존 현실(Reality)과 확장된 세계(Kwangya)를 연결하는 메타버스처럼, 우리 회사도 두 개의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해야..."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무의식적으로 에스파의 세계관을 회사 전략에 접목시켰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런데 의외로 부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김 대리, 신선한 관점이군. MZ세대를 겨냥한 메타버스 마케팅 전략... 자세한 기획안을 준비해봐."
그날 이후 회사에서 나의 위치는 180도 바뀌었다. 에스파의 열정적인 팬이라는 정체성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었고, 오히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경쟁력이 되었다. 지금은 메타버스 마케팅 팀의 리더가 되어 아이돌 산업과 기업 전략을 접목시키는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서랍 속에 숨겨두었던 나의 비밀은, 결국 내 커리어를 구원한 열쇠였다. 때로는 우리가 감추고 싶은 정체성이 가장 빛나는 재능이 되기도 한다. 오늘도 회의실에서는 에스파의 'Black Mamba'가 배경음악으로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