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아이돌: 낮에는 엑셀, 밤에는 엑스타시
회색 파티션이 감옥 같던 그날, 팀장은 또 내 보고서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28세 김지수. 대기업 기획팀 말단 사원이자, 밤이 되면 '나이트래빗'이라는 이름으로 지하 클럽을 뒤흔드는 비밀 아이돌이다.
"지수 씨, 이런 수준이면 다음 분기 평가는 기대하지 마세요." 팀장의 목소리는 에어컨 바람처럼 차가웠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쏟아냈다. 내 옆자리 동료들의 수군거림이 귓가를 스쳤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의 망신은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아팠다.
퇴근 시간. 건물을 빠져나오는 순간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꺼낸 작은 화장 파우치. 형광색 아이섀도와 반짝이는 글리터로 얼굴을 칠하며, 낮의 굴욕을 지워냈다. 검은 정장 대신 어깨를 드러내는 실버 탑을 꺼내 입었다. 거울 속에서 반짝이는 눈동자는 더 이상 기획안에 매몰된 직장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곳, '언더그라운드 K'는 내 두 번째 직장이자 비밀스러운 무대였다. 어둠 속에서 푸른빛 조명이 내 얼굴을 비추는 순간, 팀장의 목소리는 희미해지고 관객들의 환호성만이 귓가를 채웠다.
"나이트래빗! 나이트래빗!" 그들은 내 이름을 외쳤다. 팀장도, 동료들도 모르는 이름을.
내 손에 마이크가 쥐어지고, 베이스 소리가 내 심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시작된 비트에 맞춰 내 몸이 움직였다. 보고서에 굳어있던 손가락은 이제 공기를 가르며 자유롭게 춤을 췄다. 밤의 무대에서 나는 완벽했다. 낮에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환호와 인정이 여기 있었다.
그날 밤, 관객 사이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팀장이었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공포에 질려 다음 가사를 놓칠 뻔했지만, 무대의 본능이 나를 이끌었다. 쇼는 계속되어야 했다.
공연이 끝나고 분장실로 돌아오는 길, 내 앞을 가로막은 사람은 역시 팀장이었다.
"김지수 씨... 아니, 나이트래빗." 팀장의 목소리에는 낮과는 다른 톤이 깃들어 있었다. "왜 이런 재능을 회사에서는 보여주지 않죠?"
나는 대답 대신 팀장의 손에 쥐어진 것을 바라봤다. 내 공연 티켓과... 내일 프레젠테이션할 기획안이었다. 그런데 빨간 펜으로 가득 수정된 그 기획안에는 '합격'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지수 씨, 우리 회사 마케팅 전략에 당신의 밤이 필요합니다. 내일 아침, 그 열정을 회의실에서 보여주세요."
그날 이후, 나는 두 개의 무대를 오가게 되었다. 엑셀 시트와 스포트라이트 사이, 나는 어느 쪽이 진짜 내 모습인지 혼란스럽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더 이상 어느 무대에서도 내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넥타이를 매고, 글리터를 챙긴다. 직장인과 아이돌, 두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나만의 리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