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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여행

직장 속 여행: 나만의 탈출구

매일 아침 8시 42분, 김부장은 내 책상 위에 커피 얼룩을 남긴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 갈색 원이 내 서류 위에 번져나갔다. 사무실 형광등 불빛이 그 얼룩을 더 선명하게 비춘다.

"이번 분기 실적 보고서, 오늘 안으로 끝내야 해." 김부장의 목소리는 항상 그렇듯 감정 없이 메마르다. 그가 돌아서자 나는 서랍을 열어 작은 여행 가이드북을 꺼낸다. 화장실 가는 척하며 책을 펼치면, 그 순간 마법이 시작된다.

페이지 23, 산토리니의 절벽 위 마을. 창문 밖으로 보이는 잿빛 빌딩 숲은 순식간에 에게해의 깊고 투명한 푸른빛으로 변한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는 파도가 절벽에 부딪히는 소리로, 프린터의 기계음은 갈매기 울음소리로 탈바꿈한다. 코끝에는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이 스친다.

점심시간, 구내식당의 김치찌개 대신 나는 페이지 47의 방콕 길거리 음식을 맛본다. 숟가락을 입에 넣으면 입 안 가득 퍼지는 팟타이의 새콤달콤한 맛. 동료들의 잡담은 멀리서 들려오는 태국 시장의 활기찬 흥정 소리로 바뀐다.

오후 회의는 페이지 112의 파리 카페에서 진행된다. 무표정한 팀장의 얼굴은 내 눈에는 예술가의 얼굴로 보이고, 그의 단조로운 발표는 프랑스어 시낭송처럼 리드미컬하게 들린다. 창밖으로는 에펠탑이 보이고, 커피 한 모금에 프랑스 디저트의 달콤함이 번진다.

"야, 또 딴 생각하는 거야?" 옆자리 동료의 팔꿈치가 내 옆구리를 찌른다. 순간 파리는 사라지고, 회의실의 냉랭한 에어컨 바람이 다시 느껴진다.

퇴근 시간, 모두가 자리를 정리할 때 나는 페이지 189의 아마존 정글로 향한다. 엘리베이터 대신 울창한 나무를 타고 내려가고, 지하철은 강을 따라 흐르는 나무 카누가 된다. 땀에 젖은 와이셔츠는 어느새 모험가의 린넨 셔츠로 바뀌어 있다.

집에 도착해 불을 켜자 책장 위 여행 가이드북들이 빛을 발한다. 스물여덟 권. 모두 직장 생활 6년 동안 모은 것들이다. 여행 한 번 가지 못한 내게 이것들은 산소호흡기와 같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니 내일의 일정이 떠오른다. 오전에는 노르웨이 피요르드에서 카약을 타고, 점심은 스페인 타파스 바에서 먹을 예정이다. 내 직장생활은 언제나 세계 일주중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여권 없이 떠나는 여행을 마치고 잠이 든다. 내일 아침, 김부장이 또 내 책상에 커피를 흘릴 테지만, 그땐 나는 이미 몽골 초원을 말 타고 달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