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카페로: 그날의 위기
창밖으로 불빛이 번지는 퇴근 시간, 매일 앉던 회의실 의자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기 인생을 도망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쇠락한 기업의 부장으로서 오늘도 정리해고 명단을 작성하던 김태현은 자신의 이름이 CEO의 메모장에 적혀있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17년을 바친 회사에서 자신도 숫자에 불과했다는 현실이 쓰라린 커피처럼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인생이란 게 참 커피 같아요. 쓰면서도 마시게 되는." 태현이 자주 찾던 카페의 바리스타 수진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는 핸드폰을 들어 퇴사 메일을 작성했다. 그 순간만큼은 이상하게도 자유로웠다.
다음 날, 태현은 평소와 달리 출근 대신 수진의 카페를 찾았다. 햇빛이 쏟아지는 오전의 카페는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커피 내리는 소리, 원두 갈리는 향, 나지막한 재즈 음악. 그는 옷깃에 스며드는 카페의 온기를 느꼈다.
"오늘은 일 안 가셨어요?" 수진이 물었다.
"이제 안 갑니다. 그런데... 여기 바리스타 구하나요?"
수진의 눈이 커졌다. "농담하시는 거죠? 부장님이..."
태현은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지었다. "예전부터 커피에 관심이 많았어요. 이제 시작해볼까 해서요."
청량한 웃음소리가 카페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한 달 후, 태현은 앞치마를 두르고 서 있었다. 손은 여전히 서툴렀지만, 그가 내리는 커피에는 묘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직장에서 숫자로만 여겨졌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의 커피를 마시며 이름을 불러주었다.
어느 비 오는 저녁, 옛 회사의 동료들이 카페에 들어왔다. 그중에는 그를 해고 명단에 올렸던 CEO도 있었다. 그들은 태현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태현은 그들의 주문을 받으며 미소지었다.
"여기 직원이 정말 친절하네. 우리 회사도 이런 사람 좀 뽑았으면." CEO가 말했다.
태현은 그의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커피는 사람처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집니다."
CEO는 놀란 눈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인식의 순간이었다. 태현은 그날 밤 가장 완벽한 라떼아트를 그렸다. 그것은 작은 회사 로고였다. 그 위에 떨어진 비처럼, 옛 상처는 이제 그저 커피에 더해진 한 방울의 쓴맛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