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판타지: 복사기 너머의 세계
진우가 복사기의 스캔 버튼을 누른 순간, 평범한 회색 불빛이 아닌 푸른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검은 구두를 발견했다. 아니, 정확히는 구두를 신은 자신의 발을 발견했다. 자신의 몸이 복사기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뭐, 뭐야?" 진우의 외침은 복사기의 기계음에 묻혀버렸다. 복사 용지가 나오는 슬롯에서 진우의 상체가 서서히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가 나온 곳은 회사의 복사실이 아니었다.
끝없이 펼쳐진 문서 바다. 천장까지 쌓인 서류 산맥. 형광등 대신 거대한 형광펜들이 공중에 떠다니며 빛을 발했다. 멀리서는 커피 폭포가 내려와 갈색 강을 이루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잉크와 토너 향이 가득했지만, 이상하게도 상쾌하게 느껴졌다.
"이게 다 뭐지..." 진우가 중얼거렸을 때, 어디선가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한 명이 왔구나! 어서 와, 탈출자!"
두꺼운 서류 뭉치 뒤에서 나타난 것은 작은 종이집게 모양의 생명체였다. 그 뒤로 포스트잇 망토를 두른 자, 볼펜 지팡이를 든 자 등 이상한 생물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여긴 어디죠?" 진우가 물었다.
"사무용품의 나라, 오피시아야. 직장인들의 상상력과 꿈이 모여 만들어진 세계지." 종이집게가 말했다. "난 클립, 이쪽은 스티키, 저기 지팡이 든 건 파커야."
"그런데 왜 나를 '탈출자'라고 부르는 거죠?"
클립은 한숨을 쉬었다. "매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당신들은 그곳에 갇혀있잖아. 우리는 그걸 '큐비클 감옥'이라고 불러. 그곳에서 너희 상상력은 서서히 말라가지.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복사기나 프린터 같은 통로를 통해 이곳으로 오는 사람들이 있어. 바로 '탈출자'들이지."
진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리서 사람들이 즐겁게 웃으며 문서 연을 날리고, 쉬는 시간마다 먹던 과자들이 나무에 열려있었다. 누군가는 커피 강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고, 또 다른 이들은 클립보드 위에서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업무 스트레스가 없어요. 마감일도, 상사의 꾸중도, 클라이언트의 무리한 요구도 없죠." 스티키가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규칙이 있어요.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멀리서 거대한 스테이플러가 '딱! 딱!'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안 돼! '파일러'가 왔어!" 파커가 외쳤다. "그는 기한을 넘긴 모든 것을 파일에 묶어버려! 그러면 영원히 이곳에 갇히게 돼!"
클립이 진우의 손을 잡았다. "복사기로 돌아가야 해! 아직 시간이 있어!"
진우는 복사기를 향해 달렸다. 뒤에서는 파일러의 '딱!'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복사기 앞에 도착한 그는 잠시 망설였다.
"이대로 돌아가면... 다시 그 지루한 일상으로..." 진우가 중얼거렸다.
클립이 미소 지었다. "기억해, 진우. 판타지는 현실에서 시작돼. 네가 상상하는 한, 언제든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어."
진우는 결심한 듯 복사기 위에 올라탔다. 스캔 버튼을 누르자 푸른 빛이 번쩍였다.
다음 순간, 그는 회사 복사실에 서 있었다. 모든 것이 평범해 보였지만, 책상 위에는 그가 본 적 없는 컬러풀한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낯익은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상상해. 그럼 언제든 여기 올 수 있어."
진우는 웃으며 그 포스트잇을 지갑에 넣었다. 이제 그의 직장 생활은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복사기 버튼 하나로 열리는 판타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월요일 아침의 무게감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